
JTBC 드라마 ‘서른아홉’에서 정찬영이 겪은 췌장암 이야기는 단순한 드라마 설정이 아닌 현실적인 질병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는 췌장암이 왜 ‘침묵의 암’으로 불리는지, 실제 환자들이 겪는 진단 시점의 차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치료 과정에서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 약사의 시각에서 살펴봅니다.
췌장암이 '침묵의 암'이라 불리는 이유
췌장암은 췌관에서 발생하는 악성 종양으로, 조기 진단이 어렵고 진행 속도가 빠른 암입니다. 췌장은 위 뒤쪽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외부 검사로 이상을 감지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는 복통, 황달, 체중 감소 등의 증상이 나타나 병원을 찾지만 이 시점에는 이미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 속 정찬영처럼 일상 속에서 특별한 전조 없이 병원을 찾았다가 ‘말기 진단’을 받는 경우가 실제로도 드물지 않습니다. 특히 췌장의 위치상 종양이 자라더라도 다른 장기나 신경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에, 증상이 느껴질 때는 이미 암세포가 림프나 간으로 전이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췌장암은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암’, 즉 침묵의 암이라 불립니다. 의료 현장에서는 조기 발견율이 약 10% 내외에 불과하다고 보고되며, 이 때문에 수술이 가능한 환자 비율도 낮습니다. 진단 당시 절제 불가능한 병기에 해당하는 사례가 절반을 넘는다는 점이 췌장암 치료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체중 감소나 소화 불량, 피로감 같은 흔한 증상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일반적인 건강검진으로는 조기 진단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최근에는 MRI나 내시경 초음파를 통한 정밀 검사가 권장되지만, 고위험군이 아니면 실제로 검사를 받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 때문에 췌장암은 여전히 암 중에서도 가장 생존율이 낮은 질환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수치보다 중요한 '진단 시점'의 차이
췌장암의 생존율을 이야기할 때 흔히 5년 생존율 13%라는 수치가 언급되지만, 이 수치의 의미는 ‘언제 발견되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1기 단계에서 발견되면 수술과 항암치료로 생존율이 30% 이상까지 높아지지만, 문제는 이 단계에서 발견되는 환자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환자는 3기 이상에서 진단받으며, 이때는 이미 주변 혈관을 침범하거나 간으로 전이되어 수술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췌장암은 다른 암에 비해 항암제에 대한 반응성도 낮고, 전이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치료 효과가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진단 시점이 조금이라도 빨라지면 생존 기간이 유의미하게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가족력, 만성 췌장염, BRCA 유전자 변이 등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사람은 정기적인 영상검사를 통해 조기 발견 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진단 후 치료 성과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환자의 ‘전신 상태(Performance Status)’입니다. 이는 단순히 체력뿐 아니라 영양상태, 간 기능, 혈당 조절 능력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같은 병기라 하더라도 신체 상태가 좋은 환자는 수술 후 항암치료를 잘 견뎌내며 생존기간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췌장암은 단순히 병기나 크기만이 아니라, 진단 시점과 환자 상태의 조합이 예후를 결정하는 복합적인 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료 선택과 삶의 질의 균형
췌장암 치료는 ‘절제 가능성’과 ‘환자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수술이 가능한 경우, 췌십이지장절제술(휘플수술)을 시행한 뒤 항암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수술 후 합병증 위험이 높고, 회복에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환자의 체력과 간 기능을 면밀히 평가해야 합니다. 절제 불가능한 경우에는 항암치료가 중심이 됩니다. 대표적인 항암요법으로는 FOLFIRINOX나 젬시타빈 기반 병합요법이 있으며, 최근에는 이리노테칸 리포좀을 활용한 NALIRIFOX 요법도 일부 환자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합화학요법은 생존율을 일정 부분 높였지만, 부작용 관리가 쉽지 않아 치료 중단율도 높습니다. 약사로서 실제 환자분들을 상담할 때 느끼는 점은, 치료 자체보다 ‘삶의 질 유지’가 훨씬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식욕 저하, 피로, 체중 감소, 통증 등은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라 일상 회복을 가로막는 요인입니다. 따라서 항암치료와 함께 영양 보충, 통증 조절, 심리적 안정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완치보다는 완화의료를 중심으로 한 다학제 접근이 강조되고 있으며, 환자가 치료 과정에서도 스스로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췌장암은 치료가 어렵지만,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는 치료’로 접근할 때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약사 코멘트
췌장암은 발생률보다 사망률이 훨씬 높은 암으로, 진단 시점이 예후를 좌우합니다. 그러나 ‘조기 발견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평소의 건강 패턴을 스스로 관찰하고, 복부 불편감이나 체중 변화 같은 신호에 귀 기울이는 것이 첫 번째 예방입니다. 약사로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약물이나 보조제보다 생활 습관 관리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금연, 절주,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야말로 췌장을 지키는 기본이자 가장 현실적인 예방 전략입니다.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만 준비된 사람에게는 대응할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조기 진단과 꾸준한 관리, 그리고 건강에 대한 경계심이 췌장암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